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평양 전쟁/배경 (문단 편집) === ABCD 포위망과 미국의 대일 석유수출 금지 === 1941년엔 결국 미국('''A'''merica), 영국('''B'''ritain), 중국('''C'''hina), 네덜란드('''D'''utch)[*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 본토가 독일군에게 털렸지만 본토보다 훨씬 넓은 [[인도네시아]] 식민지는 영국으로 망명한 [[https://en.wikipedia.org/wiki/Dutch_government-in-exile|네덜란드 망명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다.] 이 4개국은 일본에 전략물자수출을 금지하는 소위 말하는 '[[ABCD 포위망]]'을 형성시켰다. 이것이 일본 입장에서는 치명타였는데, 전력물자에는 당연히 석유도 포함되었고, 당시 일본 전체 석유 수입의 80% 이상을 미국에서 수입하는 상황이었다는 것.[* 1980년대에 방영된 NHK 다큐멘터리에서는 90%라고 소개하고 있다. 대안으로 생각해볼법한 [[중동]]의 유전은 영국에 의해 개발되고 있었으며, 1928년 7월 31일 레드라인 협정(Red Line Agreement)에 합의한 앵글로-페르시아 석유(BP), 로열-더치 셸, [[토탈에너지스]], 엑슨모빌, 그리고 아르메니아 석유사업가 칼루스트 굴벤키안(Calouste Gulbenkian)의 5개사 카르텔이 공동으로 개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중동 유전이 2차 대전 당시 연합국인 영국, 미국, 프랑스의 소유물이었다는 뜻이고, 이 카르텔은 1948년까지 이어진다.] 당시 일본은 석유재고량은 평시 3년분, 전시 1년 반이었고, 중일전쟁중이라 석유가 더 필요한 상황인데 미국의 석유수출 금지는 일본에게 치명타였다. 또한 1941년 3월에는 무기대여법이 통과되어 영국과 중국에 무상으로 무기가 공급되기 시작했고, 6월에는 독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일본이 자국의 아킬레스 건이 될 석유 문제를 방기한채로 중국 침략을 하고 미국과 관계가 악화되는걸 방치했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온라인 상에서 일제를 깔때, 보통 일본군과 내각 수뇌부가 멍청해서 그렇다고 넘기곤 하는데, 당대의 열강이었던 만큼 당연히 그 정도로까지 멍청하진 않았다. 다만 후술하듯이, 다른 의미로 지나치게 낙관주의자였던게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낙관주의는 군인들의 시점에서 바라본 일본 군부의 시각이다. 일본 군부가 낙관주의를 가지게 된 배경에는 당시 인도차이나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린 연합국 군세가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당시 나치 독일의 공세로 인해 프랑스와 특히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하던 네덜란드는 본토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고 영국 역시 본토항공전과 같은 독일의 공습으로 부터 본토를 방어하는게 급선무였다.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조차도 정예가 아닌 수비대였다. 이렇게 일본군이 마주친 연합국 세력은 그들이 보기엔 ‘약해빠져’ 있었기 때문에 ‘별거 아니다’라고 인식이 박혀버린것이다. 물론 미국이 [[진주만 공습]]을 통해 각성하고 본게임 모드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다만 이 단락에서는 군사가 아닌 석유라는 측면에서의 낙관주의를 다룬다.] 일단, 일본은 메이지 시대 이래로 적게나마 산유국이긴 했는데[* 지금도 원유는 꾸준히 산출된다.], 아키타 현과 니이가타 현에서 석유가 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나오는 연간 산출량은 1942년 기준으로 160만 배럴이어서[[https://www.histclo.com/essay/war/ww2/stra/w2j-oil.html|#]], 해당 년도의 석유 소비량인 3천 6백만 배럴에 크게 미달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석유는 일본의 아킬레스 건이 맞았고, 미국은 당연히 이를 지렛대로 삼았으며, 일본 역시 이런 현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석유의 주 용도인 연료와 석유화학 제품을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다면, 석유가 반드시 필요한 분야에만 배급하는 식으로 경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다른게 아니라, 2차 대전 말 벌어진 전시 송출로 악명높은 [[송근유]]가 바로 이런 용도이기도 하고, 전국 교통망을 차량대신 철도로 대체하면 석탄을 활용해서 육상 교통에서의 석유 수요를 상쇄할 수 있기도 하다.[* 혹은 전철화 및 시내 궤도·무궤도전차 설치를 통해 석탄발전이나 수력발전 등을 통해 석유 사용량을 줄일 수 있다. 북한이 이런 식이다.] 이런 식의 삽질 와중에 일본이 주목한 것은 다름아닌 [[정어리]]였는데, 현대적인 어업기술을 식민지 조선에 도입하면서 1920년대부터 이미 어마어마한 어획고를 기록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정어리 기름은 윤활유 및 난방과 조명을 위한 등유로 사용할 수 있었고,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를 비료로 썼다. 하지만 1935년, 조선에서의 정어리 어획고가 75만톤을 넘어선 해에 일본 6만톤, 조선 10만톤의 정어리 어유(魚油)가 생산되게 되는데, 상황이 이쯤 되자 비료로 사용될 질소 화합물의 상당량을 화약 생산으로 넘길 수 있었고, 기술발전 덕분에 어유를 경화유 산업[* '''[[비누]], [[양초]], [[글리세린]], [[마가린]]''' 등을 생산한다.]의 자원으로 활용하면서 경공업 수요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생산량이 충분해지자 어유 그 자체를 연료로 이용하여 저품질의 연료로도 굴러갈 수 있는 민간/군사 영역, 특히 선박용 기름으로 충당하려고 했다. 물론 이 물량만으로도 석유를 완전히 대체하는건 불가능하긴 했지만, 낙관적인 예상대로라면 선박용 연료의 50%를 정어리 어유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제국주의 열강국에 있어서 해군과 상선단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것도 제 3위의 해군국이었던 일본에서 소비하는 선박용 연료의 50%를 충당한다니, 일제 입장에서는 이 목표에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성공이다.] 그리고 1937년에는 정어리 어획고가 '''조선에서만 138만톤'''을 찍으면서 정어리 기름을 통한 일본의 에너지 반자립의 꿈(?)이 눈앞에 있었으며[* 언뜻 보면 웃겨보이지만, 1차 대전 당시 독일에서는 [[초석]]을 [[질산암모늄]] 합성으로 대체하면서 화약과 비료 독립을 달성하고, 온 유럽과 치고 박은 성공 사례가 있었으니...][* 다시 말하지만, 일제도 정어리 기름으로 석유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리라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미국의 석유에 완전히 묶여있던 시기보다 운신의 폭이 크게 넓어졌을 뿐이다.], 일본의 내각 역시 미국의 지렛대에서 해방되었다고 여겼다. 그 시점부터는 미국의 항의는 예전같은 무게는 없었으며, 산발적인 테러로 일관하던 중국 침공도 [[중일전쟁]]으로 본격화하게 된다. 하지만, 해당 해를 기점으로 상승세는 꺾였다. 1939년까지 백만톤을 가뿐히 넘기던 어획고는 추락하기 시작했고, 태평양 전쟁이 개전하던 1941년에는 60만톤, 전쟁이 시작된 1942년에는 '''7천톤'''으로 어획고가 추락하게 된다[* 갑작스럽게 어획량이 줄어든 이유는, 정어리는 몇십년 주기로 어획량이 폭증했다가 폭락하는 것을 반복하는 어종이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2000년대에 정어리의 씨가 말랐다가 2013년부터 어획량이 늘어서 2023년 현재 정점을 찍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어리의 꿈이 부서지던 1941년에는 이미 석유 금수 조치가 시작되고, 일본은 다시 미국의 석유가 필요한 나라였다. 결국 일본은 미국과 교섭을 시도하고, 1941년 11월 26일 미국국무장관 [[헐 노트|코델 헐]]과 주미일본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사이에서 협상을 벌인다. 일본의 목표는 미국이 중국 지원을 중단할 것(전쟁이 끝나면 석유문제에서 해결될 수 있으므로)과 국제연맹에서 부정당했던 만주국 승인이었고, 미국은 이미 무기대여법이 통과되고 대규모 함대 건조와 경제동원이 시작된 상황이었으므로 시간만 버는것이 최소 목표였다. 따라서 협상에서 공식적으로 미국은 추축동맹 파기, 점령지의 군경 철수 및 이권포기, [[만주국]]의 해체 등 사실상 이행하기 힘든 강경한 조건을 내걸었고, 일본 역시 미국은 유럽의 전쟁에 중립을 지키고 태평양에서 일본의 팽창을 묵인할 것, 만주국의 승인, 경제 협력 강화, 필리핀의 독립을 보장할 것, 중국이 중일전쟁에서 항전을 포기하도록 공동으로 압력을 가할 것 등 이행하기 힘든 제안을 했다. 이에 미국은 만주국은 승인하되 중국에서의 철수와 동남아에 대한 침략을 중지하라는 타협안을 내놓지만 이미 다 이긴 전쟁으로 보이는 중일전쟁을 포기하라는 이야기며 일본에게 1894년부터 이어진 안보정책을 무(無)로 돌리라는 제안이므로 역시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지만 ABCD포위망은 여전히 일본을 옥죄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의 석유 비축량을 줄어들기만 할 것이며 미국의 군사적 우위는 늘어나기만 할 뿐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일본은 결국 중일전쟁 포기와 네덜란드령 동남아시아의 석유 확보 중 후자를 선택함으로서 전쟁을 결정하게 된다. 당시 협상에 대해 일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인 추축동맹 파기, 점령지의 군경 철수 및 이권포기, [[만주국]] 해체 등을 내걸며 석유금수조치를 취한 미국의 강경노선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시기의 미국은 이미 벌어진 독소전쟁에서 소련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독소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한다면 2차대전은 추축국이 승리할 것이고, 이를 막기 위해서 미합중국 전쟁부는 1941년 겨울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련이 버텨야 하고 1942년 봄부터는 소련이 승기를 잡기에 충분한 무기를 공급할 수 있을만큼 미국의 무기생산량이 증가할 것이라 예상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의 남진에 몇 배나 강력한 보복 정책을 시행함으로서 소련을 간접적으로 도우는 것에 집중했고, 협상 역시 미국 입장에서는 시간을 버는 것만으로도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던 것이다.[* 즉, 협상이 결렬되면 앞길이 막막한 일본과는 달리 미국은 협상의 결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오직 시간만 벌면 되는 입장이었고, 이후 소련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오히려 결렬되는 쪽이 이득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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